옛글 › 징비록 › 권12 진사록

명나라 장수와 더불어 화친이 계책이 아님을 논한 것을 아뢰는 장계馳啓與。天將論講和非計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989자 · 낭독 8.8분

징비록 권12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前日提督發怒於船隻不時整齊欲拿致臣還止事則已爲狀啓矣今日李摠兵寧戚遊擊金錢遊擊世禎來在東坡立旗牌于館正廳假家呼臣等叅拜臣等以提督旣云旗牌乃。皇上之命豈容不拜若又辭避則必生大事故仍往叅拜李戚錢三人與查摠兵同在一處招臣等及巡察使李廷馨同坐極言倭奴旣已乞貢而。朝廷已許之且爾國人民幾盡死亡農作盡廢事勢危迫之狀縷縷不已臣對之曰老爺此言意思安在遊擊等言。朝廷旣已許貢本國亦當勿爲勦捕以遵經畧牌文臣等不勝憤欝對之曰我國若欲與倭奴講和則不待今日當初倭賊要和於我國者非一非再一爲投書於東萊再投於尙州三投於平壤而我國憤倭奴有不恭。天朝之語爲天下大義寧死不辱以至於此今倭賊焚燒。廟社發掘。丘陵屠戮人民有不共戴天之讐乃以牌文更爲禁約報讎此小邦人民之所以痛心切骨而不敢承命者也戚錢兩人反覆爭辨或書寫以示或嚴辭峻責臣對之曰獘邦雖小亦知有君臣父子之義今倭賊有君親之讎爲必報之地不圖。天將更以殺賊爲罪兩人又云此。朝廷之命。天子聖旨而經畧提督奉行何敢不從且倭奴已許返。王子陪身及人民朝鮮亦當相時度勢姑爲容忍待後國勢稍康軍兵稍鍊自有復讎之日如句踐之生聚訓鍊方爲長遠之慮豈可不忍目前之忿而敗大計乎臣答之曰雖以利害言之恐。天朝爲此賊所欺自古中國與外夷講和而誤事者多炎錢遊擊勃然大怒以手裂去所書之紙厲聲相詰戚遊擊笑而解之臣曰小國兵力寡弱不能自復大讎萬死無惜至於和戰大計。天朝制之小邦不敢干預攤以口舌爭願辭退遊擊云經略牌文當遵行臣答之曰各處官義之兵皆有報復父母兄弟之讎登能禁之况未承寡君之命安敢擅便遵行遊擊等怒曰此乃。朝廷之命雖。國王豈敢異同今若往禀。國王而後行則吾輩寧能坐待乎辭色峻絕斷無回意臣等辭出既而還入請見則李總兵拂衣先馳向馬山去獨與戚錢論說縷縷爭辨移時而不聽臣等退來又具呈文入送二人怒曰若然則吾當禀於提督撥兵還去任爾等自處旣而戚錢二人又欲向馬山全羅巡察使營傳示牌文要臣等出公文傳示全羅營且令出人向導令通事下人環立催促立馬以待臣等念此乃。天朝命令終不可以言辭停止不得已移文於全羅營略言戚錢遊擊持牌文進去除傳通各處外整齊軍兵如有倭奴亂出搶掠隨處截殺不少饒貸事成送遊擊等取見然後始爲起去卽刻京畿左監司成泳馳報內。天將下帖以近日我國人民與倭憐釁。天朝法令全然不遵有倭夷效順而朝鮮反叛亂之語至拿成泳等于軍門查究云其言不可忍聞而在我國軍民萬姓之心痛心切骨而無如之何大抵事勢難處至於如此而亦緣臣等誠意淺薄不能感動。天將目見此事罪死無赦請先正臣等之罪而。朝廷別樣區處

지난날 제독이 배를 제때 가지런히 대지 못한 일로 노하여 신을 잡아들이려다가 그만둔 일은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

오늘 총병 이녕(李寧)과 유격 척금(戚金)과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동파에 와서 객관 정청의 가가(假家)에 기패를 세우고 신들을 불러 참배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제독이 이미 「기패는 황상의 명이니 어찌 절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만일 또 사양하여 피하면 반드시 큰일이 날 것이므로 그대로 가서 참배하였습니다.

이·척·전 세 사람이 사 총병(査總兵)과 함께 한자리에 있으면서 신들과 순찰사 이정형(李廷馨)을 불러 같이 앉게 하고는 「왜놈이 이미 조공을 빌었고 조정이 이미 이를 허락하였다. 게다가 너희 나라는 백성이 거의 다 죽고 농사도 다 폐하여 형세가 위태롭고 급하다」고 낱낱이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에 답하기를 「노야의 이 말씀은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습니다.

유격 등이 「조정이 이미 조공을 허락하였으니 너희 나라도 마땅히 적을 잡아 죽이지 말고 경략의 패문을 좇으라」 하였습니다. 신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만일 왜놈과 화친하고자 하였다면 오늘을 기다릴 것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왜적이 우리나라에 화친을 요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한 번은 동래에 글을 던지고 두 번째는 상주에 던지고 세 번째는 평양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왜놈이 명나라에 공손하지 못한 말을 한 것을 분히 여겨 그것을 천하의 큰 의리로 삼아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되지 않으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왜적이 종묘와 사직을 불사르고 능을 파헤치고 백성을 마구 죽였으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도리어 패문으로 원수 갚는 일을 금하여 묶으니 이것이 작은 나라 백성이 마음 아프고 뼈에 사무쳐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였습니다.

척·전 두 사람이 거듭 다투어 따지며 더러는 글로 써서 보이고 더러는 엄한 말로 준절히 꾸짖었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저희 나라가 비록 작으나 또한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의리가 있음은 압니다. 이제 왜적에게 임금과 어버이의 원수가 있어 반드시 갚아야 할 처지인데, 명나라 장수께서 도리어 적을 죽이는 것을 죄로 삼으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또 말하기를 「이는 조정의 명이요 천자의 성지이다. 경략과 제독이 받들어 행하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는가. 게다가 왜놈이 이미 왕자와 조선의 신하와 백성을 돌려보내기로 허락하였으니, 조선도 마땅히 때를 보고 형세를 헤아려 잠시 참고 견디다가 뒷날 나라의 형세가 조금 튼튼해지고 군사가 조금 단련된 뒤에 절로 원수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구천(句踐)이 백성을 모아 기르고 가르쳐 단련한 것처럼 하는 것이 바야흐로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니, 어찌 눈앞의 분을 참지 못하여 큰 계책을 그르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이해로 말하더라도 명나라가 이 적에게 속을까 두렵습니다. 예부터 중국이 바깥 오랑캐와 화친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전 유격이 발끈 크게 노하여 손으로 써 놓은 종이를 찢어 버리고 소리를 높여 서로 따지니, 척 유격이 웃으며 말렸습니다.

신이 「작은 나라는 군사 힘이 적고 약하여 스스로 큰 원수를 갚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화친과 싸움의 큰 계책에 이르러서는 명나라가 정하는 것이요 작은 나라가 감히 간여할 바가 아니니, 입과 혀로 다투기를 그만두고 물러가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유격이 「경략의 패문은 마땅히 좇아 행하라」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곳곳의 관군과 의병이 다 아비와 어미와 형과 아우의 원수를 갚으려 하니 어찌 이를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아직 우리 임금의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제 마음대로 좇아 행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유격 등이 노하여 「이는 조정의 명이다. 비록 국왕인들 어찌 감히 달리하겠는가. 이제 만일 국왕에게 여쭌 뒤에 행한다면 우리가 어찌 앉아서 기다리겠는가」 하였습니다. 말과 낯빛이 준절하여 돌이킬 뜻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하직하고 나왔다가 이윽고 다시 들어가 뵙기를 청하니, 이 총병은 옷을 떨치고 먼저 말을 달려 마산으로 갔고 척·전 두 사람과만 낱낱이 논설하며 다투기를 한참 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물러 나와 또 글을 갖추어 들여보내니 두 사람이 노하여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제독에게 여쭈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하였습니다.

이윽고 척·전 두 사람이 또 마산의 전라 순찰사 진영으로 가서 패문을 전하여 보이고자 하여, 신들에게 공문을 내어 전라 진영에 전하여 보이게 하고 또 사람을 내어 길을 인도하게 하라 하며 통사와 아랫사람을 시켜 둘러서서 재촉하고 말을 세워 기다렸습니다. 신들은 이것이 명나라 조정의 명령이라 끝내 말로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 하는 수 없이 전라 진영에 글을 옮겨 「척·전 유격이 패문을 가지고 나아가니 여러 곳에 전하여 알리는 것 말고도 군사를 가지런히 하여, 만일 왜놈이 함부로 나와 노략질하거든 곳에 따라 막아 죽이고 조금도 용서하지 말라」는 뜻으로 대강 적어 보냈습니다. 유격 등이 이를 받아 본 뒤에야 비로소 떠나갔습니다.

방금 경기 좌감사 성영(成泳)이 달려 알린 것에 「명나라 장수가 첩문을 내려 「요사이 우리나라 백성이 왜와 틈을 내고 명나라 법령을 전혀 좇지 않는다」 하며 「왜는 순순히 따르는데 조선이 도리어 반란한다」는 말까지 하고, 성영 등을 군문으로 잡아다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은 차마 들을 수 없고, 우리나라 군사와 백성 만백성의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치나 어찌할 바가 없습니다.

대체로 사세의 어려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 또한 신들의 정성이 얕고 엷어 명나라 장수를 움직이지 못한 탓입니다. 이 일을 눈으로 보니 죽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신들의 죄를 바로잡으시고 조정에서 달리 조처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협주 6

癸巳四月十九日

계사년 사월 열아흐레

저본은 攤이나 難의 잘못으로 봄

저본은 陪身이나 陪臣의 잘못으로 봄

저본은 登이나 豈의 잘못으로 봄

저본은 憐이나 構의 잘못으로 봄

가가(假家) — 임시로 지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