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3 진사록

진주성이 함락된 곡절을 달려 아뢰는 장계馳。啓晋州城陷曲折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1,266자 · 낭독 10.5분

징비록 권13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防禦使金應瑞馳報內被擄逃還人私奴萬春招內晋州攻城時在高峰結陣處凡接戰曲折一一看審則賊晋州城五里外東西北向及南江越邊凡二十八處結陣其日接戰時倭賊先爲放炮城內之人亦放銃筩賊進迫城下城內人攅射如雨賊多致死傷還爲退陣其日夜三更賊多放鳥銃皷譟大呼而城中之人不爲搖動第三日賊伐取穉松雜草作空石盛土城外三十步許造山四處又作四層樓閣高九仭許俯瞰城中以爲放炮之所造山造樓時城中人無數發射死者甚多而賊不計死生死者曳出生者進前不日成之多登其上無數放炮城中之人少無驚懼反示揚揚自得之意賊退陣第六日黃昏諸陣之賊咸聚一處城中人放震天雷三度落於賊中衆賊觀其體樣之際坼裂觸死者不可勝數賊不敢戰還退第七日城中之人又放銃筩一度賊亦多死戰數不利將欲退兵更生謀計一日伐木作板東邊有大槐木一倭攀上其木見其城中虛實後以板子鋪之於城外掘取其下漸就城底第八日午時城子三十餘把不意頹落槐木攀上之倭一吹螺角諸陣倭賊或騎或步一時突進城中人弓銃搶劒俱發極力拒戰賊徒冒死踐屍突入守城之人勢窮力場退縮一隅賊已入城中彼我交鋒相爲血戰死者不可勝數城中積尸如山彼我相半而死我國人溺死浮水者亦不知其幾陷城之日不計男女兒童盡數斬殺翌日則殺男子擒女人載船先送釜山浦諸倭仍留晋州其隣邑如固城河東昆陽等處日日焚蕩擄掠又明日有騎步倭十名持踏圓印文書來衆倭聚首爭見曰斯速回兵入國事吾國王之命云欣欣喜悅又明日群倭皆向昌原金海去小人亦隨去因戀家鄕逃來現告云云事牒報又據被擄逃回人朱義壽招內倭賊於晋州前年退築新城地形平坦處造作山臺凡八處俯臨城中多放鐵丸而其山臺束竹遮障不相連續故雖放玄字銃筩幸而得中只爲貫穿而已不得催倒渠之將帥李宗仁逐日力戰賊束竹乘夜齊立於壕邊矢石不能入因自束竹之內亂投瓦礫於壕中及城底頃到塡滿賊之着鐵甲者十餘人突進城底將爲破城宗仁曰事急矣卽自射臺發大箭射之洞貫七賊賊少退其時忠淸兵使隱於城堞聞宗仁射殺七賊喜而起立擧頭觀望之際鐵丸中頭口貫額仆地卽曳去自初被圍黃進極力備禦至於身擔土石肩背爲之出血旣而賊又以大木版作樻如棺狀外以生牛皮數重褁之載於童車之上賊入其中直推到城下以鐵物毀城城中亂投藁草柴木灌油藝火間間燒燬而擁城底數三石賊已拔出城穴城將頹圯城中計不知所出之際有一賊持鐵掘錐大呼直進拔出城穴上大石城遂頹落城中又以拒塞木荆棘塡塞賊冒死入城而城中之人亦死戰賊幾不能入適倡義使金千鎰之軍守北城聞城毀先爲驚動棄城奔走賊望見從北城因以竹梯登城三賊攀堞大呼衆賊四面俱入城不能支李宗仁獨在所守處射矢不撤俄而爲鐵丸所中流血淋漓顚仆不省人事義壽扶起不得遂自逃去云各處馳報及取招之辭雖有詳略而大槪皆同宗仁黃進等力戰殉國之忠尤可歎賞而諸將金千鎰崔慶會等聞城陷亦相携痛哭於矗石樓上自投崖下而死城中積尸如山三十里內臭不可近而館舍閭閻蕩然一空城堞亦皆夷平賊雖退去更無完集之勢但此乃兩南咽喉保障之地其在城中者雖盡死亡而四境遺民奔竄山谷賊退之後不可不趁時還集且其境內年糓頗盛而土賊結黨橫行邑無主宰則餘民雖欲來尋故居而有不可得臣欲差遣假牧使眼前無可合者不得已令別將朴宗男率軍士數十餘人馳去審視後曉諭人民禁止侵掠仍爲假守之任以待。朝廷處置

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급보에,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노 만춘(萬春)의 진술은 이러하였습니다.

진주를 칠 때 높은 봉우리의 진 친 곳에 있으면서 싸움의 곡절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적은 진주성 오 리 밖 동·서·북쪽과 남강 건너편 모두 스물여덟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날 싸울 때 왜적이 먼저 포를 놓자 성 안 사람도 총통을 놓았습니다. 적이 성 아래로 다가들자 성 안 사람이 화살을 비 오듯 모아 쏘니 적이 많이 죽고 다쳐 도로 진으로 물러갔습니다. 그날 밤 삼경에 적이 조총을 많이 놓고 북 치며 떠들고 크게 소리쳤으나 성 안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흘째에 적이 어린 소나무와 잡초를 베어 빈 자루를 만들어 흙을 담아 성 밖 서른 걸음쯤 되는 데에 산을 네 군데 쌓고, 또 사 층 누각을 아홉 길쯤 높이로 지어 성 안을 굽어보며 포 놓는 자리로 삼았습니다. 산을 쌓고 누를 지을 때 성 안 사람이 무수히 쏘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나, 적은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죽은 자는 끌어내고 산 자가 앞으로 나아가 며칠 안 되어 이루었습니다. 그 위에 많이 올라 무수히 포를 놓았으나 성 안 사람은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의기양양한 뜻을 보였습니다.

적이 진으로 물러간 엿새째 황혼에 여러 진의 적이 모두 한곳에 모였는데, 성 안 사람이 진천뢰를 놓으니 세 번 적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뭇 적이 그 생김새를 보던 참에 터져 맞아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적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도로 물러갔습니다. 이레째에 성 안 사람이 또 총통을 한 번 놓아 적이 또한 많이 죽었습니다.

싸움에서 여러 번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물리려다가 적이 다시 꾀를 내었습니다. 하루는 나무를 베어 널을 만들었습니다. 동쪽에 큰 회화나무가 있어 왜 하나가 그 나무에 기어올라 성 안의 허실을 보았고, 뒤에 널을 성 밖에 깔고 그 아래를 파 들어가 점점 성 밑에 이르렀습니다. 여드레째 낮에 성 삼십여 발이 뜻밖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회화나무에 올랐던 왜가 소라 나발을 한 번 부니 여러 진의 왜적이 더러 말 타고 더러 걸어 한꺼번에 돌진하였습니다. 성 안 사람이 활·총·창·칼을 다 내어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적의 무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주검을 밟고 뛰어들었습니다. 성을 지키던 사람은 형세가 다하고 힘이 다하여 한 모퉁이로 물러나 움츠렸고, 적이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저와 우리가 칼끝을 맞대고 서로 피 흘려 싸워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성 안에 주검이 산처럼 쌓였는데 저와 우리가 반씩 죽었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물에 빠져 죽어 떠오른 자도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성이 함락된 날에는 남녀와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였고, 이튿날은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사로잡아 배에 실어 먼저 부산포로 보냈습니다. 여러 왜는 그대로 진주에 머물며 이웃 고을 고성·하동·곤양 등지를 날마다 불사르고 노략질하였습니다. 또 이튿날 말 타고 걸은 왜 열 명이 둥근 도장 찍은 문서를 가지고 오니, 뭇 왜가 머리를 모아 다투어 보고 말하기를 「빨리 군사를 돌려 나라로 들어오라는 것이 우리 국왕의 명이다」 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또 이튿날 왜의 무리가 모두 창원·김해로 향해 갔고, 소인도 따라갔다가 고향이 그리워 도망쳐 와 알립니다 하였습니다.

또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온 주의수(朱義壽)의 진술에 따르면 이러하였습니다.

왜적이 진주에서 지난해 물러나며 새로 쌓은 성의 땅이 평탄한 곳에 산대를 모두 여덟 군데 만들어 성 안을 굽어보며 철환을 많이 놓았습니다. 그 산대는 대를 묶어 가렸는데 서로 잇닿지 않았으므로, 현자총통을 놓아 다행히 맞아도 그저 꿰뚫을 뿐 무너뜨리지 못하였습니다. 장수 이종인(李宗仁)이 날마다 힘써 싸웠습니다. 적이 대를 묶어 밤을 타 해자 가에 나란히 세우니 화살과 돌이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어 묶은 대 안에서 기와와 자갈을 해자 속과 성 밑에 어지러이 던져 잠깐 사이에 메워 찼습니다. 철갑 입은 적 열댓 명이 성 밑으로 달려들어 성을 헐려 하자 이종인이 「일이 급하다」 하고 곧 사대에서 큰 화살을 쏘아 적 일곱을 꿰뚫으니 적이 조금 물러났습니다. 그때 충청 병사가 성가퀴에 숨어 있다가 이종인이 적 일곱을 쏘아 죽였다는 말을 듣고 기뻐 일어서서 머리를 들어 바라보던 참에, 철환이 머리에 맞아 이마를 꿰뚫고 땅에 엎어져 곧 끌려 갔습니다. 처음 에워싸인 때부터 황진(黃進)은 힘을 다해 막아 몸소 흙과 돌을 져 어깨와 등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윽고 적이 또 큰 널로 궤를 짜 관 모양을 만들고 밖을 날소가죽으로 여러 겹 싸서 수레 위에 실었습니다. 적이 그 속에 들어가 곧바로 밀어 성 아래에 이르러 쇠붙이로 성을 헐었습니다. 성 안에서 짚과 섶을 어지러이 던지고 기름을 부어 불을 놓아 이따금 태워 없앴으나, 성 밑을 받치던 서너 돌을 적이 이미 뽑아내어 구멍이 나고 성이 무너지려 하였습니다. 성 안에서 계책이 나오지 않던 참에 한 적이 쇠 송곳을 가지고 크게 소리치며 곧장 나아가 구멍 위의 큰 돌을 뽑아내니 성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 안에서 또 막을 나무와 가시로 메워 막으니,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왔으나 성 안 사람도 죽기로 싸워 적이 거의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북쪽 성을 지켰는데, 성이 헐렸다는 말을 듣고 먼저 놀라 흔들려 성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적이 바라보고 북쪽 성을 따라 대사다리로 성에 올랐습니다. 적 셋이 성가퀴를 잡고 크게 소리치자 뭇 적이 사면으로 다 들어와 성을 지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종인은 홀로 제 지키던 곳에 있으면서 화살 쏘기를 거두지 않았는데, 이윽고 철환에 맞아 피가 흥건히 흘러 엎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의수가 붙들어 일으키지 못하고 마침내 스스로 달아났다 하였습니다.

여러 곳의 급보와 받은 진술이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대개 다 같습니다. 이종인과 황진 등이 힘써 싸워 나라에 목숨 바친 충성은 더욱 기려 칭찬할 만합니다. 여러 장수 김천일·최경회(崔慶會) 등은 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촉석루 위에서 통곡하다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성 안에 주검이 산처럼 쌓여 삼십 리 안이 냄새로 가까이 갈 수 없고, 관사와 민가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으며 성가퀴도 모두 평평하게 깎였습니다. 적이 비록 물러갔으나 다시 온전히 모일 형세가 없습니다. 다만 이곳은 양남의 목구멍이며 보루가 되는 땅입니다. 성 안에 있던 자는 비록 다 죽었으나 사방 지경의 남은 백성이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었으니, 적이 물러간 뒤 때맞추어 도로 모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지경 안의 그해 곡식이 자못 잘되었는데 토적이 무리를 지어 함부로 다니고 고을에 맡을 이가 없으면, 남은 백성이 옛 살던 곳을 찾아오려 해도 될 수 없습니다. 신이 가목사를 보내려 하나 눈앞에 알맞은 사람이 없어, 부득이 별장 박종남(朴宗男)에게 군사 수십여 명을 이끌고 달려가 살펴본 뒤 백성을 타이르고 침노와 노략을 금하게 하며, 그대로 임시로 지키는 소임을 맡겨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협주 1

七月十五日

칠월 열닷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