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4 진사록

파사성을 고쳐 베푸는 밖에 다시 양근 산성을 조처하기를 청하는 장계請修設婆娑城外更爲措置楊根山城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12자 · 낭독 3.4분

징비록 권14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卽見備邊司行移云云夫婆娑一城雖在上流而各處關防津渡路徑之雜出者豈可以一城而盡爲防塞乎壬辰之變賊陷忠州分兵北上一運由驪州淸心樓前渡涉其時元豪率數百之兵把截江北數日而賊兵不得徑渡婆娑城在驪州利川之間其所形勢相連可以控制者只此數邑而已若論其遠勢則必須堅守忠州又以重兵留屯原州而與鳥竹兩嶺之勢相爲輔車然後婆娑之勢始固矣婆娑以下又有要害必守之地楊根南山正當沙灘而過此則迷原之路加平之路月溪之路皆從此分出若賊過原州由婆娑之後直向楊根則惟此處爲可控扼臣今行登此山審察形勢則其山非徒關於守灘上與婆娑相對下與芙蓉相望直當江邊諸路之會實一形勝之地故責令楊根郡守崔輔臣漸次措置栅壘爲屯守之計距此十餘里又有咸公山城在龍門山上四面斗絕又是天險可爲一境老弱避亂藏糓之所故幷爲分付措置大槪畿甸遺民百役叢集瘡痍困頓之狀不可忍見防守禦賊之事雖出於生道役民而役巨民殘如蟻聚垤難望成就於時月之間極爲痛悶忠州原州措置等事則各令其道當事之臣申勅擧行俾無緩不及事之患矣

이제 비변사에서 보낸 이문을 보니 이러이러하였습니다. 무릇 파사성(婆娑城) 하나가 비록 상류에 있으나, 곳곳의 관방과 나루와 잔길이 어지러이 나 있는 것을 어찌 한 성으로 다 막겠습니까.

임진년 변에 적이 충주를 함락하고 군사를 나누어 북으로 올라올 때, 한 무리는 여주를 지나 청심루 앞으로 건넜습니다. 그때 원호(元豪)가 수백 군사를 거느리고 강 북쪽을 막아 끊으니 며칠 동안 적병이 곧바로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파사성은 여주와 이천 사이에 있어 그 형세가 서로 이어져 다잡을 수 있는 곳은 다만 이 두어 고을뿐입니다. 그 먼 형세를 논하면, 반드시 충주를 굳게 지키고 또 무거운 군사로 원주에 머물러 진 치게 하여 조령과 죽령 두 고개의 형세와 서로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처럼 된 뒤에야 파사의 형세가 비로소 굳을 것입니다.

파사 아래에 또 요해로 반드시 지킬 땅이 있습니다. 양근 남산은 바로 사탄(沙灘)에 맞닿았고, 여기를 지나면 미원 길과 가평 길과 월계 길이 다 여기서 갈려 나갑니다. 만일 적이 원주를 지나 파사 뒤로 말미암아 곧바로 양근으로 향하면 오직 이곳이 막아 누를 만합니다.

신이 이번 길에 이 산에 올라 형세를 살피니, 그 산은 여울을 지키는 데 관계될 뿐 아니라 위로 파사와 서로 마주하고 아래로 부용과 서로 바라보며 바로 강가 여러 길이 모이는 자리에 당하여 실로 한 형승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양근 군수 최보신(崔輔臣)에게 책임 지워 차츰차츰 목책과 보루를 조처하여 진 치고 지킬 계책을 삼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또 함공산성(咸公山城)이 용문산 위에 있어 네 면이 가파르고 끊겼으며 또한 하늘이 낸 험한 곳이라, 한 지경의 늙은이와 어린이가 난을 피하고 곡식을 감출 자리가 될 만하므로 아울러 조처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

대개 기전에 남은 백성에게 온갖 부역이 몰려 상처 입고 지친 꼴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막아 지키고 적을 막는 일이 비록 살릴 길에서 백성을 부리는 데서 나왔으나, 공역은 크고 백성은 잔약하여 개미가 흙무더기에 모이는 것 같으니 몇 달 사이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어려워 몹시 아프고 답답합니다.

충주와 원주를 조처하는 등의 일은 각기 그 도의 일 맡은 신하에게 거듭 타일러 거행하게 하여, 늦어 일에 미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협주 2

형승(形勝) — 지세가 뛰어나 요긴한 곳을 이른다.

이문(移文) — 관아끼리 주고받는 공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