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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군수 최보신을 추고하지 말고 그대로 두기를 청하는 장계請楊根郡守崔輔臣勿推仍任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368자 · 낭독 3분

징비록 권14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臣巡到楊根邑中品官金應舜等五六十人呈狀于臣云本郡自經賊幾闔境空虛孑遺之民百不一存而爲嶺南往來之路使命絡繹刷馬供頓百獘旁午不能支當適郡守崔輔臣淸謹勤幹盡去獘瘼近日詔使之行一國騷擾而郡守處置得宜境內之民不至甚哲今聞以秘密狀。啓路中開拆之故被推恐至罷去不勝痛悶一境大小之民各出米豆合五十石已爲積置請以此爲軍糧而贖郡守推考之罪云云臣因以訪察民情則似皆出於至誠故臣喩以爾等民情當爲上。聞而納米之事近於無名但旣已聚合則還散亦難本郡束伍軍二百餘名軍器未備脫有緩急難以空手赴敵若以此糓爲匠人料食措備弓箭分給軍士使之佩持禦敵則此乃以一鄕公共之力爲一邑軍士之用有補於公家無害於事體庶爲便當云則郡民皆喜悅稱謝咸欲依此施行大抵楊根在京城上流上與婆娑相連下與龍津相接防守措置其事甚急崔輔臣以年少武臣到任之初頗得民情若又遞去則此處之事不成模樣不但民情缺然而已故不敢不達

신이 양근에 순행하여 이르니 고을의 품관 김응순(金應舜) 등 오륙십 명이 신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에, 본 고을은 적을 겪은 뒤로 거의 온 지경이 비어 겨우 남은 백성이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영남을 오가는 길이 되어 사명이 잇달고 쇄마와 공돈으로 온갖 폐단이 바쁘게 얽혀 감당하지 못합니다. 마침 군수 최보신(崔輔臣)이 맑고 삼가며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어 폐막을 다 없앴습니다. 요사이 조칙 사신의 행차로 온 나라가 소란하였으나 군수가 처치를 마땅하게 하여 지경 안 백성이 심하게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들으니 비밀 장계를 길 가운데서 뜯은 까닭에 추고를 입어 파직에 이를까 두려워 아프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온 지경의 크고 작은 백성이 각기 쌀과 콩을 내어 합쳐 쉰 석을 이미 쌓아 두었으니, 청컨대 이것으로 군량을 삼고 군수의 추고할 죄를 속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뜻을 물어 살피니 다 지성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타이르기를, 너희의 뜻은 마땅히 위에 아뢰겠으나 쌀을 바치는 일은 이름 없는 데 가깝다. 다만 이미 모았으니 도로 흩기도 어렵다. 본 고을 속오군 이백여 명이 군기를 갖추지 못하여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맨손으로 적을 맞기 어렵다. 만일 이 곡식으로 장인의 삯과 먹을 것을 마련하고 활과 화살을 갖추어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차고 지녀 적을 막게 하면, 이는 한 고을이 함께 낸 힘으로 한 고을 군사의 쓰임을 삼는 것이라 나라에 보탬이 있고 사체에 해가 없어 자못 편하고 마땅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고을 백성이 다 기뻐하며 사례하고 모두 이대로 시행하기를 바랐습니다.

대개 양근은 서울 상류에 있어 위로 파사와 서로 이어지고 아래로 용진과 서로 맞닿아 막아 지키고 조처하는 일이 몹시 급합니다. 최보신은 나이 젊은 무신으로 부임한 처음에 자못 백성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만일 또 갈려 가면 이곳 일이 꼴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백성의 마음이 서운해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협주 1

二月

이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