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4 진사록

오총병 군중에 떠도는 말을 달려가 아뢰는 장계馳。啓吳總兵軍中流言事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42자 · 낭독 3.7분

징비록 권14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自吳總兵來駐安東後軍中盛言此處人民有投入倭奴之意或言府使鄭賜湖有女子二人爲倭所擄故府使與倭相通而輸送糧餉一人倡之百人和之洶洶不已適本府居民自前多數剃髮賣爲女髢如此者十居八九故唐人動輒脫笠查驗以爲投入賊中而來作奸細雖收繫還釋闔境之人疑懼日增赴役者亦不肯入於官府且軍門差官白潢恐被搶掠呵噤安東之糓勿令輸入於慶州大丘等處而各營句管之人恐未及期會逐日移文催督甚急守令不得已潜輸外縣倉糓使之從間路輸去唐兵處處譏察以爲輸送於賊中見輒毆打中路勒駐胥動浮言無所不至又於昨日陳遊擊軍人於十里外捉得安東人剃髮者以爲倭諜嚴囚獄中且陳遊擊軍三人托以樵採出送於三息程外昨昨日走回來告倭奴三名本國人二名皆着本國衣服不意收縛將爲過夜偶然一人得脫解縛逃來云云百爾思之似不近情而疑訝之際又添一倍非但公然倡說察其氣色景像不佳雖厮養下卒若逢我國官人必聚首指示臣之出入時所見如此大小將官若以此移咨則車門亦或以先入爲主不無轉達。天朝之患大槪如此無形之事雖曰保無他虞自古天下之事未甞不因其疑阻遂成難追之悔自。朝廷商量處置俾無意外之患

오총병이 안동에 와 머문 뒤로 군중에 「이곳 백성이 왜에게 붙을 뜻이 있다」는 말이 성하고, 혹은 「부사 정사호(鄭賜湖)가 딸 둘을 왜에게 사로잡혔으므로 부사가 왜와 서로 통하여 군량을 실어 보낸다」 하여,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화답하여 흉흉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마침 본 고을 백성이 전부터 많은 수가 머리를 깎아 덧머리로 팔아 온 터라 이런 자가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그러므로 명나라 사람이 걸핏하면 갓을 벗겨 조사하여 「적중에 붙었다가 돌아와 적의 염탐꾼 노릇을 한다」 하고, 비록 잡아 가두었다 도로 놓아주기는 하나 온 지경 사람이 의심하고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부역에 나아가는 자도 관부에 들려 하지 않습니다.

또 군문에서 보낸 관원 백황(白潢)이 노략을 입을까 두려워하여 안동 곡식을 경주·대구 등처로 실어 들이지 말라고 꾸짖어 막았습니다. 그런데 각 영에서 맡은 사람은 기한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날마다 글을 보내 재촉함이 몹시 급하므로, 수령이 마지못해 바깥 고을 창고 곡식을 몰래 실어 샛길로 날라 가게 하였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곳곳에서 기찰하여 「적중으로 실어 보낸다」 하며 보는 족족 때리고 길 가운데 억지로 붙들어 두니, 서로 뜬말을 일으켜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또 어제는 진유격의 군인이 십 리 밖에서 머리 깎은 안동 사람을 잡아 왜의 첩자라 하여 옥중에 엄히 가두었습니다. 또 진유격의 군사 셋이 나무하러 간다는 핑계로 삼십 리 밖에 나갔다가 그저께 달아나 돌아와 고하기를 「왜놈 셋과 우리나라 사람 둘이 다 우리나라 옷을 입고 있다가 뜻밖에 우리를 잡아 묶어 밤을 지내려 하기에, 우연히 한 사람이 묶은 것을 풀고 벗어나 도망해 왔다」 하였습니다. 백 가지로 생각하여도 실정에 가깝지 않은 듯하나, 의심하고 이상히 여기는 즈음에 또 한 곱절을 더하였습니다.

공공연히 말을 지어낼 뿐 아니라 그 기색과 낌새를 살피건대 좋지 않습니다. 비록 종이나 졸개라도 우리나라 관인을 만나면 반드시 머리를 맞대고 가리키니 신이 드나들 때 본 바가 이러합니다. 크고 작은 장수와 군관이 만일 이것으로 공문을 올려 보내면 군문 또한 혹 먼저 들은 것을 위주로 삼아 명나라 조정에 전달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대개 이같이 형체 없는 일은 비록 다른 근심이 없다고 보장한다 하나, 예부터 천하의 일이 그 의심과 막힘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뒤미처 따를 수 없는 뉘우침을 이루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조정에서 헤아려 처치하여 뜻밖의 걱정이 없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