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소굴의 형편과 군병의 죽고 다친 수를 달려가 아뢰는 장계馳。啓賊窟形止及軍兵死傷狀
臣歲前一日進往蔚山初一日平明與都元帥權慄巡察使李用淳等及諸將官行禮後謁見經理行新歲問慰之禮經理問糧餉輸運之事臣等又詣提督令進入幕內同坐行茶語之曰當初擊倭時俺軍五百名定爲先登此後楊登山擺賽二將軍繼之權慄答以此事小的親見之提督又曰俺平日每恨朝鮮軍不能擊賊今。天兵攻賊而猶不易朝鮮之軍不能擊賊無足恠也又云朝鮮之人能力戰都元帥亦能號令。天朝聞之豈不喜悅臣與儲人措辭叩謝而退少頃經理語臣曰此處大軍留駐多日糧餉之運萬分緊急議政不須留此須卽還後頭雖有一石之糓早早輸運爲可臣卽辭退還到慶州矣經理駐在處與賊窟僅一馬場餘賊窟據孤山之顚築三重石城甚爲堅固城上皆設廊屋見之寂若無人而軍到城下則炮丸亂發中者無不穿透前日連次進攻時。天兵與我軍多死傷故不復攻之聞城內飢乏無水欲以持久困之晦日夜令金應瑞率降倭伏兵於城外井泉之傍捉得倭人之出汲者十餘人經理甚喜問其賊中事狀則亦言糧絕無水勢甚窮縮其詳必在接伴使狀。啓臣查點我國各將軍兵死傷逃亡時存之數則戰死者二百九十八名逢丸重傷者八百七十六名逃亡者四千九百八十二名時存陣中者三千八百十三名京畿軍人則除出以爲運糧負草之軍而平安之軍今日始到陣所矣
신이 섣달그믐 하루 전에 울산으로 나아갔다가, 초하루 날이 밝을 무렵 도원수 권율(權慄)·순찰사 이용순(李用淳) 등 및 여러 장수와 군관과 더불어 예를 행한 뒤 경리를 뵙고 새해 문안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경리가 군량을 실어 나르는 일을 묻기에 신 등이 대답하였습니다.
또 제독에게 나아가니 막사 안으로 들어와 함께 앉게 하고 차를 내며 이르되 「당초 왜를 칠 때 내 군사 오백 명이 먼저 오르기로 정하였고 그 뒤에 양등산(楊登山)·파새(擺賽) 두 장군이 이었소」 하니, 권율이 「이 일은 소인이 친히 보았습니다」 하고 답하였습니다. 제독이 또 이르되 「내가 평소에 늘 조선 군사가 적을 치지 못함을 한하였으나, 이제 명나라 군사가 적을 치는 데도 오히려 쉽지 않으니 조선 군사가 적을 치지 못함은 괴이할 것이 없소」 하고, 또 이르되 「조선 사람이 힘써 싸울 수 있고 도원수도 호령할 수 있으니, 명나라 조정이 들으면 어찌 기뻐하지 않겠소」 하였습니다. 신과 여러 사람이 말을 갖추어 사례하고 물러났습니다.
조금 뒤에 경리가 신에게 이르되 「이곳에 대군이 머문 지 여러 날이라 군량 나르는 일이 만분 긴급하오. 의정은 여기 머물 것 없이 모름지기 곧 돌아가서, 뒷면에 비록 한 섬 곡식이 있더라도 일찍 실어 나르는 것이 옳소」 하기에, 신이 곧 하직하고 물러나 경주로 돌아왔습니다.
경리가 머물러 있는 곳은 적의 소굴과 겨우 한 마장 남짓 떨어져 있습니다. 적의 소굴은 외딴 산꼭대기에 의지하여 삼중 돌성을 쌓아 몹시 굳고, 성 위에는 다 행랑을 베풀었습니다. 보기에는 고요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나 군사가 성 아래 이르면 포와 탄환이 어지러이 나오는데 맞은 자는 뚫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날 잇따라 나아가 칠 때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가 많이 죽고 다쳤으므로 다시는 치지 않습니다. 들으니 성안이 주리고 물이 없다 하므로 오래 버티어 곤하게 하려 합니다.
그믐날 밤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항복한 왜를 거느리고 성 밖 우물가에 복병하게 하여 물 길으러 나온 왜인 십여 명을 잡았습니다. 경리가 몹시 기뻐하여 적중의 사정을 물으니 또한 「군량이 끊기고 물이 없어 형세가 몹시 궁하고 옹색하다」 하였습니다. 그 자세한 것은 반드시 접반사의 장계에 있을 것입니다.
신이 우리나라 각 장수의 군병 가운데 죽고 다치고 도망하고 지금 남아 있는 수를 조사하여 헤아리니, 싸우다 죽은 자가 이백아흔여덟 명, 탄환을 맞아 중상한 자가 팔백일흔여섯 명, 도망한 자가 사천구백여든두 명, 지금 진중에 남아 있는 자가 삼천팔백열세 명입니다. 경기 군인은 덜어 내어 군량을 나르고 꼴을 지는 군사로 삼았고, 평안도 군사는 오늘에야 비로소 진소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