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4 진사록

명나라 군사가 물러난 뒤 여러 일을 처치한 장계天兵退後處置諸事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43자 · 낭독 3.8분

징비록 권14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今此蔚山之役。天兵初日乘賊不意以兵馬蹂之賊倉皇不能支吾奔敗不暇外栅爲。天兵所奪賊被逐入內城魄喪膽破若於此時登時進薄則內窟可以卽破而貪其斬級擄掠之利未免遲徊於城外賊遂得入城閉門堅守天兵與我軍累日攻之且無器械內薄登城輒爲炮丸所傷不克而退死者日積於城下旣而左右道之賊從水陸來救其數極多。天將知其勢難遽卽回軍外賊與窟中之賊相應合攻。天兵與我軍之在箭灘者被害尤多而我軍則亦多乘亂逃走者初五日諸將金應瑞金大虛朴毅長高彥伯權應銖成允文鄭起龍李時言韓明璉具思稷李廷堅等皆會於慶州而散軍稍稍來集者總計八百餘名臣與都元帥權慄相議使之仍駐慶州鄭起龍則還右道更收餘兵以爲遮截之計而。天兵糧餉輸到慶州者尙多若留之恐爲賊所資令巡察使從事官成安義次知支給我軍之料江原道軍糧船運迎日者又三千石此距賊船往來處尤近卽傳令於左水使李雲龍使之護輸於寧海府藏置待令上道軍糧方輸在道者各令收拾還去道內人民竭盡心力男女老弱負戴追隨庶幾得見平賊之日不幸至此莫不驚駭皆有散潰之計可爲痛哭臣姑留慶州數日少定人心追後上去安東經理駐軍處以待。朝廷指揮計料

이번 울산 싸움에 명나라 군사가 첫날 적이 뜻하지 못한 틈을 타 군마로 짓밟으니, 적이 창황하여 버티지 못하고 달아나 무너질 겨를도 없어 바깥 목책을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쫓겨 내성으로 들어가 넋이 빠지고 담이 깨어졌습니다. 만일 이때에 곧바로 나아가 다그쳤더라면 안 소굴을 곧 깨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베기와 노획을 탐하여 성 밖에서 머뭇거림을 면하지 못하였고, 적은 마침내 성에 들어가 문을 닫고 굳게 지키게 되었습니다.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가 여러 날 쳤으나 또 병기가 없어 안으로 다가가 성에 오르면 번번이 포와 탄환에 상하여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니, 죽은 자가 날로 성 아래 쌓였습니다. 이윽고 좌도와 우도의 적이 물과 뭍을 좇아 와서 구원하는데 그 수가 지극히 많으므로, 명나라 장수가 그 형세로는 갑자기 하기 어려운 줄 알고 곧 군사를 돌렸습니다. 바깥 적과 소굴 안의 적이 서로 응하여 함께 치니, 전탄에 있던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가 해를 입은 것이 더욱 많았고 우리 군사는 또 어지러운 틈을 타 도망한 자가 많았습니다.

초닷샛날 여러 장수 김응서(金應瑞)·김대허(金大虛)·박의장(朴毅長)·고언백(高彥伯)·권응수(權應銖)·성윤문(成允文)·정기룡(鄭起龍)·이시언(李時言)·한명련(韓明璉)·구사직(具思稷)·이정견(李廷堅) 등이 다 경주에 모였는데, 흩어진 군사로 조금씩 와서 모인 자가 모두 팔백여 명입니다. 신이 도원수 권율(權慄)과 서로 의논하여 그대로 경주에 머물게 하고, 정기룡은 우도로 돌아가 다시 남은 군사를 거두어 막아 끊을 계책을 삼게 하였습니다.

명나라 군사의 군량으로 경주에 실어 이른 것이 아직 많은데, 만일 그대로 두면 적의 밑천이 될까 두려우므로 순찰사 종사관 성안의(成安義)로 하여금 맡아 우리 군사의 먹을 몫으로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강원도 군량으로 배에 실어 영일로 온 것이 또 삼천 석인데, 이곳은 적의 배가 오가는 곳과 더욱 가까우므로 곧 좌수사 이운룡(李雲龍)에게 전령하여 영해부로 호송해 간직해 두고 명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윗녘 군량으로 바야흐로 길에 실려 있는 것은 각각 거두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도 안의 백성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남녀와 늙고 약한 이가 지고 이고 뒤따르며 적을 평정하는 날을 보기를 바랐는데, 불행히 이에 이르니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 다 흩어져 무너질 뜻을 품으니 통곡할 만합니다.

신은 아직 경주에 며칠 머물러 인심을 조금 진정시킨 뒤에, 뒤따라 경리가 군사를 머무른 안동으로 올라가 조정의 지휘를 기다릴 작정입니다.